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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 그리고 테크노인문학

by JamesLee posted Apr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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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장자 그리고 테크노인문학

 

연세대학교 공학대학원

테크노인문학전공 6기 이상만

 

 어릴 적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아버지는 여러 어른들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대부분 60, 70년대를 달려오셨던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늘 하시던 말씀은 어른말을 잘 들어라, 학교 선생님의 말을 잘 들어라,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해라 등 매우 고리타분한 말씀이셨다. 평생을 근면, 성실 하게 살아왔고, 지도자들의 말씀을 잘 따르고 시키는 것만 해왔기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생이 참 심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은 늘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른이 되고 잘 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엄청난 경제 폭풍을 맞았고 가정과 회사들은 붕괴 되었으며, 이제 다시 일어서고는 있지만 사실상 그 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릴적 어른들이 제시해왔던 충, 효의 개념과 먼나라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이상적인 지도자와 나라가 실제로 어른이 되어보니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외쳐왔지만 실제로는 유교적 개념을 가지고 끊임없이 계급주의로 국민들을 억압하고 규법을 따르게 하고, 효도하고 충성해야 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 당시의 일상을 들여다 보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많다. 통행금지, 치마길이 단속, 장발 단속, 심지어 학교에서 조차 경례를 올리던 모습이 불과 몇 십년 전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IMF를 넘어 다양한 분쟁을 극복하고 중진국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리고 마치 선진국에 금방 도달할 듯한 말들을 언론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일부에서는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선진국이 곧 도달할 것 처럼 흥분된 어조로 도취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나는 과거 어른들의 말들을 믿고 착한 아이가 되었던 것처럼 또 다시 언론의 아이가 되어 멍청하게 시키는 데로 기다리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긴 사족을 붙였는지 궁금해 하실 것이다. 나는 테크노인문학이라는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최초의 길을 가고 있다. (본 과를 만들어 주신 교수님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드리고 싶다) 선진국 이라는 것은 돈이 많은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개념적인 세상은 결코 현실적인 자본의 흐름에 목적이 있지 않다. 내가 다니는 학과인 테크노인문학과 처럼 선진국 이라는 것은 시키는 것, 외워야 할 것을 외우는 곳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방향, 쟝르를 새로 개척해 나가는 곳이라 생각한다. 1979년 최초의 B형 간염 백신은 국내 보건당국의 인증기준이 없다는 것으로 세계 최초가 될 기회를 놓치고 3년뒤 미국, 프랑스 등에서 인증 기준이 발표된 뒤 보건 당국에서 국내 인증을 그 해외 인증의 기준으로 내어주는 바람에 3번째가 되었다. (이미 시장은 선점되었고….) 대한민국이 후진국,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면 새로운 것을 해내야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너무나 당연시 해야 한다. 2019년인 올해까지도 내가 개발했던 홀로그램 네비게이션은 국내 자동차 인증 기준(대부분 현대차에 장착되어야 기준이 생겨난다)이 없다는 이유로 싱가폴에서 추진중이다. 무려 40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새로운 쟝르를 개척하여 창조적 상상력을 현실화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위에 제시한 예는 너무나 일부분에 불과 하다.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창의적 쟝르 창조를 할 수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구조, 사상이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번 학기부터 노자, 장자를 배우고 있다. 공학도가 무슨 노자냐, 장자냐 하시는 분들도 주위에 많다. 아직 대꾸하지 않았다. 나 역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러한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방향으로 공부를 가져다 쓰고자 한다. 인문학적 이해가 없던 때에는 노자와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자연으로 돌아가 욕심없이 살어리랏다로 이해했었다. 마치 숲속을 거닐면서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도인과 같은 모습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그 무위(無爲)에서 새로운 새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500년전 분들이 말씀하신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노자와 비교되는 공자의 사상은 인()을 중심으로 세상을 개념화 하여 이상세계로 가는 도()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을 정의 내리고 개념화 하고 구분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은 군자와 소인, 임금과 백성으로 신분과 위치가 개념화 되고 편을 가를 수 있는 여지를 늘 가지고 있다. 이런 사상은 군주 중심의 나라를 통치하기에 너무나 유리하고 조선과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에는 적절한 사회 이념이다. 하지만 이런 이념으로는 개인들의 다양성, 사회의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노자, 장자의 사상은 이와는 반대로 개념화 하는 것을 지양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무위(사상적 독립)을 강조 하고 있다. ,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세상과 멀어져 있는 사상이 아니라 너무나도 개인의 생활 속에 녹아있고, 그것을 깨우쳐서 다양성을 안을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상이었다. 그것은 대답하는 공부가 아니라 질문하는 공부였고, 외우고 문제 푸는 공부가 아니라 창의성을 발현하는 공부였던 것이다. 무위는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편견, 아집, 내가 배워와서 공고히 된 나의 머리속 개념화된 것들을 버리라는 말씀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굴곡을 거치며 나는 스스로 방어적이고 나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양한 개념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또한 각종 언론은 내 머리속의 개념들을 충동하고 간섭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내가 개념을 버리고 편견을 버리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일을 있는 그대로, 주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즉 무위자연 할 때 그 물상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 호기심, 상상력이 질문을 통해 구체화 되고 창의적 산출물이 발현된다. , 나 스스로가 호기심 가득한 무위자연 할 때에 창의적 상상력이 발현되고 그것이 사업이나 개인사와 연결될 때에 진정 다음 단계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부터라도 주도적 자세로 나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시키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람들이 분류한 것을 넘어서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업이든, 공부든, 혹은 집안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마님께서 저녁 설거지를 시키셨으나 주방을 청소한 것 처럼!)

 

다시 한 번 테크노인문학과를 만들어주신 선구자 교수님들에게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